펫로스 증후군이라는 말을 검색창에 적었다가 잠시 손을 멈추는 밤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픈 마음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반갑지만, 그 이름을 내게 붙여도 되는지는 망설여집니다. 밥그릇 하나를 치우지 못하는 일이 유난처럼 보일까 봐, 회사에서 갑자기 눈물이 난 까닭을 다른 일로 둘러대기도 합니다.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말하면 조금 덜 설명해도 될 것 같지만, 그 다정한 말 안에도 오늘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검색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병의 이름이 아니라, 이만큼 아픈 사람이 나 말고도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을지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잃은 뒤의 슬픔은 관계의 깊이와 주변이 허락하는 자리 사이에서 자주 어긋납니다. 매일 약을 챙기고 잠든 숨소리를 확인하며 함께 나이 들었던 시간은 분명한데, 밖에서는 그저 동물 한 마리가 없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슬픔을 충분히 인정받거나 드러내기 어려운 처지를 “박탈된 애도”라고 부릅니다. 슬퍼할 능력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슬픔이 머물 사회적 자리가 좁다는 뜻입니다.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검색어를 찾아왔다고 해서 그 마음을 곧바로 병으로 판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은 누군가의 상태를 재단하는 대신, 말하지 못했던 경험을 설명하는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서울대 수의인문사회학교실과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응답자의 21.3%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에게 공감을 받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이 숫자가 누군가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까지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말을 꺼냈다가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끝을 흐린 사람이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키우면 되지”라는 말이 위로로 건네졌더라도, 듣는 사람에게는 함께 살았던 존재가 쉽게 대신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말처럼 남을 수 있습니다. 그 뒤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그리움까지 작아진 것은 아닐 겁니다. 때로는 슬픔보다 슬픔을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일이 먼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집 안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미 지난 일인데, 산책하던 시각이 오면 몸이 먼저 현관을 향합니다. 냉장고를 열다가 더는 사둘 필요가 없는 간식을 떠올리고, 세탁한 옷에서 털 한 올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두기도 합니다. 이런 순간들은 거창한 추모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살았다는 것은 특별한 날뿐 아니라 별일 없던 오후와 사소한 버릇까지 나누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진에 남지 않은 시간이 생활 속에 흩어져 있으니, 부재 역시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문득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텅 빈 방보다 조용해진 발밑이 더 낯설게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름을 자주 부르고, 어떤 사람은 한동안 입 밖에 내지 못합니다. 물건을 남겨두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밖에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그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잘 웃었던 하루와 몹시 보고 싶은 밤이 같은 날에 있어도,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거짓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그저 반려동물이었던 존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함께 시작하고 끝내던 가족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힘들어?”라는 질문에는 그 함께한 시간이 빠져 있습니다. 슬픔의 크기를 변호하지 않아도 그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 어쩌면 지금 가장 드문 것은 그런 자리일지 모릅니다.

